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R O S P S K T M S G

 

잡 감정 #1

아, 내 인생의 한 부분을 굉장히 기쁘게 해 주었던 것.

5년 간 내가 못 했던 일.

 

바텐더.

이 일이 다시 시작될 것 같다. 가슴이 뛴다. 기쁘다.

어떠한 형태로든, 시작될 것 같다.^^

 

 

잡 감정 #2

내 인생의 두 권째의 오늘을 펼쳐 보았다.

“…인간이 일시적으로 정한 규칙과 너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

 

과연.

 

 

잡 감정 #3

오늘 동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선진그랜드호텔에서 라면과 공기 밥을 먹으며 언제나 느껴오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나는 역시나 이상주의자 일까. 아니면 (정치적인 의미를 넘어서, 모든 것에 있어) 중도주의자일까. 뭐, 간단히 말하자면 양쪽 다이고 싶다.

 

경제학자, 독립투사, 폐허 속의 의사, 야학선생님, 오지의 신부님..

나는 공통분모를 찾았다. 내 자신을 경제학자라 믿으며, 생각하며.

 

수도 울란바토르에서는 좀처럼 빈곤을 느낄 수 없다. 아니, 빈곤이라는 실체를 느끼기에는 내게 씌워진 허상이 몇 겹이나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전이라는,

통제라는, 

그리고 무엇보다, 부족함이라는.

 

나의 부족함이 찰진 내 몸에서 뚝뚝 떨어져 나가길 원한다.

그것이 빵이 되어 어떤 사람이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초심을 잃지 않는다. 소모소모(원체? 과연?) 내게 초심이란 있었을까? 있는 것일까?

그 변하지 않는 초심이란, ‘실천하지 못 한 지성, 실천하지 않은 지성, 랄까 부족한 지성’ 이라는 이름아래 어떻게 보면 굳건하게 지켜져 왔는지도 모른다.

 

내 어린 시절 있었던 콤플렉스와 같던 나에 대한 자기 정의,

‘뜨거운 가슴에, 뜨거운 머리’

그리고 내가 원했던 것은 그 차가운 머리다. 케인스가 가졌던, 아담 스미스가 가졌던, 마르크스가 가졌던, 또 다른 누군가가 가졌던, 그것.

하지만 나는 그들이 가진 차가운 머리의 실체를 알지도 못 한 채, 그들의 명성만을 좇아 왔음은 틀림없다. 이 또한 실체를 못 보게 한 허상 중 하나다.

 

이 같은 것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깨닫지는 못 했었다. 지금 또한 깨달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나, 단 하나만은 확실할 것 같다.

‘내가 전적으로 뜨겁거나, 혹은 전적으로 차가워야 한다면, 나는 나를 불태우겠다.’

 

뜨거운 머리면 어떠랴. (어떻긴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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